한국아마추어무선의 역사는 일제(日帝)시대까지 포함할 경우 193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
나라 고유의 PREFIX(HL 등)가 아닌, 일본의 것(J8AA∼J8OZ)을 사용하였으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그 틈에서 불과 몇 명의 조선인이 아마추어무선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도 제2차 세계대전과 함
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어디를 가나 아마추어무선을 즐기는 그들은 이 땅에서도 예외 없이
아마추어용 주파수의 전파를 발사하였다. 그래서 해방 덕분에 우리 나라에 할당된 HL이라는 PREFIX가 우리들이
한번 써 보기도 전에 외국인의 손으로 먼저 전 세계에 퍼졌다. 누가 허가를 해줬는지 또는 무허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HL의 전파는 우선 미군의 손에 의해 발사되었고 처음부터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 속에서 한 두명의
한국인이 몰래 HL의 호출부호로 무허가 전파를 냈다가 헌병(MP)의 포위를 받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정부가 수립되고 이제는 우리에게도 무선국을 허가를 해 주겠지"하고 기다릴 틈도 없이 6.25전쟁이
일어났다. 아마추어무선은 결국 한 두명의 입에만 오르내린 채 어둠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민족의 불행한 수난사와 함께 묻혀 있던 아마추어무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휴전이 성립되고 얼마 후부터 였다.

 

이 땅의 아마추어무선의 선구자들은 개인적으로 정부와 교섭을 시작하여 아마추어무선국의 허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무선=간첩]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라 한국에서 이것이 쉽사리 성공할 리가
없었다.

무선국 허가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이들 선구자들은 무허가로 전파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갔다. 자칫하면 간첩으로 오해받을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아마추어무선이 간첩에 이용된 것은 아마추어무선 역사이래
한번도 없었음을 알고 있는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 세계로 전파를 내보냈다.한국에서 언제 햄이 나올려나?
라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 세계의 햄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그들은 곧 유명해졌다.

그러나 숨어서 하는 일이 오래 갈 수는 없어, 그 중 여러 명이 경찰, 헌병 또는 전파감시국 감시망에 적발되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1954년 여름, 무허가로 몰래 전파를 내던 햄들과 전파도 못내고 안타까워하던 햄들은 드디어 단체의 힘이 필요함을 느끼고 햄들의 연합체를 만들자고 나섰다. 그리하여 햄들이 제일 많았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약 반년의 기간을 거쳐 1955년 4월 20일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의 창립총회를 열고 동국무선고등학교의 교실을
하나 빌려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KARL; Korean Amateur Radio League)의 간판을 걸 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무선계 최초의 단체로서 전파협회보다 3∼4년, 전파공학회보다도 7∼8년이 빨랐다.

 

한국에서 햄(HAM)관련 단체가 생기게 된 것은 1955년 4월 20일 사단법인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이 창립 총회를
가짐으로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 공대, 문리대 학생들과 일반인 등 40여먕의 동호인이 주동이 되어 단체를 만들므로서 한국에도
아마추어무선연맹이 존재 한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초대 이사장은 그 당시 공보처 방송관리국의 기감인 이 인관(李 寅觀) 님이 선출되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는데,
KARL의 제1차적 목표는 아마추어무선의 개방이었고, 그 다음은 아마추어무선을 일반인에게 널리 인식시켜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 뿌리깊이 박혀 있는 [무선공포증]을 치료하는 일이었다.

KARL의 회원은 대부분 학생이어서 그 재정은 어려웠지만, 이사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기관지인 [KARL]을 발행
하였는데, 열성파들의 손으로 긁어서 등사하고 제본하였으며, 활자 인쇄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누가 돈주고 하라면 하지 않을 것이라며 웃으며 일했다고 한다. 오직 아마추어무선을 개방시켜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뭉쳐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 당시 한국의 전파계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 써먹던 "무선전신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법안에는
"아마추어무선"이란 용어 조차 없었으므로 KARL은 실험무선국이란 이름으로 무선국 허가를 내 줄 것을 체신부에
요청 하였다.

 

KARL이 창립된 지 한달 후, 당국은 개인국의 허가는 어려우나, 학교에는 허가해 주겠다는 언질을 받아,
그 첫 번째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실험무선국 HL2AA 라는 호출부호가 허가되었고 그 뒤를 이어 체신학교,
동국무선고등학교와 광운대학교,한양대학교,연세대학교 등으로 늘어 갔다.

그러나 아마추어무선이란 원래 자기 집에 설치해 놓고 즐기는 것이 원칙인지라 개인국에 대한 소원은 점점 더 강해만 갔는데, 1958년 말경에는 미국인에게 3국(局) 허가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1959년 6월 2일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이사장 앞으로 한국 최초의 단체 아마추어무선국 HL9TA 가 허가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1959년 7월 19일 HL9TA 는 최초의 전파를 전 세계에 내보내게 되었다.

그 이후 KARL은 끊임없이 당국과의 절충을 계속하였으며, 햄 자격시험을 위한 강습회도 열었는데, 1960년 6월
부터는 드디어 개인 아마추어무선국의 허가 신청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KARL은 HL9TA 외에 또 하나의 이동용 아마추어무선국을 신청하여 드디어 1960년 8월 1일 HM9A 라는
호출부호를 허가 받았다. 이 때부터 한국인의 아마추어무선국은 HL 대신에 HM이라는 PREFIX를 사용하게 되어,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의 HL9TA는 HMØHQ 로 호출부호가 변경되었다.

이 무렵, KARL은 한국 아마추어무선의 완전 개방과 한국의 PREFIX가 HL에서 HM으로 바뀌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제주도에서 HM9A라는 호출부호로 한국 최초의 이동운용을 하였다. 제주도로 간 HM9A는 목포, 제주,
서귀포, 부산, 대구로 순회하면서 전파를 발사하여 10일 동안 약 30여 개국의 햄들과 교신하여 한국아마추어무선
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1960년 9월에 접수된 개인국의 허가신청은 신원조회를 거쳐 9월 3일에 [가허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0년 11월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 6회 과학전람회에 KARL은 이동용 아마추어무선국 HM9A/1 을 운용
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아마추어무선국이 일반 시민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으며,
매년 KARL은 HM9A를 과학전람회에서 공개운용을 하므로서 일반인에게 아마추어무선이 무엇을 하는 것 인가를
보여 주었다.

 

① 제1차 독도 이동 운용
1962년 2월 2일 14:41분, 동경 131도 52분, 북위 37도 24분, 울릉도에서 약 80km 떨어진 대한민국의
최동단(最東端) 고도(孤島)인 독도에서 HM9A/5 라는 이동 무선국이 전송하는 1차 원정대의 전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 일간의 말썽거리로 일본이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 떼를 쓰고 있는 독도에 가서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선포하고자,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에서는 5명의 햄, 지휘(HM1AS), 운영(HM1AA), 정비(HM1AW), 의무(HM1AU), 수송(HM1-SWL, HM1BK)이 파견되었으며, 한국일보사가 후원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장비는 송신기 : HF - Johnson Viking II(3.5 ∼ 28MHz), 출력 : 전신(150W), SSB(120W),
VHF - Homebrew TX(50MHz), 출력 : 전신(30W), 전화(20W)였으며, 수신기는 Hammerland SP-600,
VHF 트랜시버 PRC-6 2대, 발전기 2.5kW 등이었다.

첫 교신은 이란의 EP2EB라는 무선국과 이루어졌으며, 13일 동안 36 Country에 JA(254), VK(98), W/K(12), KR6(28), ZL(20), DU(14), 9M2(12) 총 569국과 교신하면서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전파를 통하여
전 세계에 선포하였다.

② 제2차 독도 이동 운용
1976년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 1주일 동안 독도에서 TBC-TV와 조선일보의 지원하에 HM9A/5로 제2차
독도 이동운용을 하였다.

제2차 원정에는 대장(HM1Bo), 부대장(HM1CR), 총무(HM1GU), 그리고 HM1HM, HM1II, HM1IW 등 20여명의
햄들이 참여하였으며, TBC-TV에서는 [인간만세] 시간에 [독도수비대]라는 제목으로 HM9A/5가 소개되었고,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톱기사로 독도원정 사실을 알려주었다.

 

1961년 2월 1일 16:30분 경남 진해항을 출발하여 독도를 향해 운행 중에 한국 최초의 함상 이동무선국을 운용,
부산 앞 해상에서 노르웨이의 < LA5VB >와 59+로 첫 교신에 성공하였다.

2월 2일 04:05분 VK4SS와의 교신을 끝으로 최초의 HM9A/MM은 LA(1국), VK(9국), DV(2국), VS6(1국),
W(1국), CR9(1국), 9MS(1국)과 교신을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HM9V/OX는 QANAQ(그린랜드)라는 곳에 설치를 하고, HL9N/OX는 탐험대의 베이스 캠프에 설치하여 전진대와는 소형 트랜시버로 운용하면서 통신망을 구성하였으며, 대장(HM1AS), 기술(HM1JA), 행정(HM1BO, HM1FM),
전파예보(HM1EJ, HM2JN) 등이 참여하였다.

이 북극권 탐험을 계기로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에 HM9N과 HM9V의 이동무선국의 호출부호를 허가 받았는데,
북극(Northpole)을 상징하는 머리글자(Initial)를 따서 HM9N으로 명명하였고, 그리고 북극권 탐험의 승리
(Victory)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HM9V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